유래
시조 : 성인보(成仁輔)시조 성인보(成仁輔)의 고려 중기 때 사람이며,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저의 후손이라고 한다. 성인보(成仁輔)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중윤을 지냈다. 후손들도 창녕에서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麥山)에 있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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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성몽열(成夢說) : 문과(文科) 중종34년(1539) 별시 갑과 장원급제성덕윤(成德潤, 1689生) : 문과(文科) 경종2년(1722) 알성시 갑과 장원급제성이민(成以敏, 1565生) : 문과(文科) 선조28년(1595) 별시2 갑과 장원급제성진(成晉, 1565生) : 문과(文科) 세조11년(1465) 춘당대시 을과 장원급제성유열(成有烈, 1698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별시 갑과 장원급제성삼문(成三問, 1698生)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중시 을과 장원급제성임(成任, 1698生)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발영시 이등성중온(成仲溫, 1698生)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을과성희안(成希顔, 1461生) : 문과(文科) 성종16년(1485) 별시 이등성세명(成世明, 1447生) : 문과(文科) 성종6년(1475) 친시 병과 등 모두 482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34명, 무과 21명, 생원진사시 322명, 음양과 5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항렬자
33世
문(文) 무(武) | 34世 균(均) 배(培) | 35世 선(善) 은(銀) | 36世 강(康) 우(雨) | 37世 원(元) 춘(春) |
38世 하(夏) 연(然) | 39世 신(信) 교(敎) | 40世 구(九) 의(義) | 41世 승(承) 만(滿) | 42世 동(東) 채(彩) |
43世 용(容) 지(志) | 44世 중(中) 재(在) | 45世 상(商) 금(錦) | 46世 준(準) 홍(洪) | 47世 화(和) 수(秀) |
48世 남(南) 칠(七) | 49世 효(孝) 치(致) | 50世 백(百) 록(錄) | 51世 운(雲) 호(浩) | 52世 래(來) 상(相)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4세손은 33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창녕(昌寧)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옛 창녕현(昌寧縣)과 영산현(靈山縣)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본래 삼한시대에 불사국(不斯國), 이후의 빛벌가야(非火伽倻) 지역이었다. 신라에 의해 555년(신라 진흥왕 16)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565년(진흥황 26)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군(比斯伐郡)으로 개칭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으로 바뀌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창녕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창녕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274년(원종 15)에 영산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창녕현으로 되었고, 1631년(인조 9)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얼마 후에 복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창녕군·영산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60년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창녕성씨는
1985년에는 총 37,903가구 158,385명,
2000년에는 총 52,058가구 167,90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