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성현(成俔)
  • 창녕성씨(昌寧成氏),  출생~사망 : 1439 ~ 1504
조선 초기의 학자.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 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 觀光錄' 이라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 대사성, 동부승지,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 가사 중 '쌍화점 雙花店', '이상곡 履霜曲', '북전 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또, 한편으로는 관상감, 사역원, 전의감(殿醫監), 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용재총화 ○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부휴자담론 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