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성세장(成世章)
  • 창녕성씨(昌寧成氏),  출생~사망 : 1506 ~ 158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회(景晦), 중회(仲晦). 호는 사암(思菴). 아버지는 감찰 희문(希文)이며, 희공(希恭)에게 입양되었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로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44년 헌납이 되고, 1545년(명종 즉위년)지평, 이듬해 부교리, 수찬, 검상 등을 지냈다. 그뒤 사도시정(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8년 사인(舍人), 집의(執義), 경기도암행어사, 이어서 응교(應敎), 사간(司諫), 도승지를 거쳐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직, 2년간 여러 승지를 지낸 뒤 1553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다음해 경기도관찰사, 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제학을 거쳐 그뒤 대제학, 공조참판, 대사간,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1563년 한성부좌윤, 함경도관찰사, 1565년 형조참판, 1567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역임, 1573년(선조 6) 등극부사(登極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와 호조의 판서에 이어 우참찬이 되었다. 1576년 다시 예조판서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한편, 이기(李○)가 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 데 대한 잘못을 논박한 바 있으며 윤원형(尹元衡)의 매관매직하는 잘못을 충고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