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성사달(成士達)
  • 창녕성씨(昌寧成氏),  출생~사망 : ? ~ 1380
고려의 문신. 호는 역암(易菴). 군수를 지낸 언신(彦臣)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1352년(공민왕 1) 대호군이 되었다. 같은해 9월에는 대호군으로 정방(政房)에서 사사로이 벼슬 40여건을 수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하옥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복직되었으며,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다음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그 공으로 추충협익공신(推忠協翊功臣)이 되었으며, 이해에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녹적(錄籍)되었다. 1364년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었을 때 여진(女眞)의 삼선(三善), 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 지금의 洪原), 삼철(三撤: 지금의 北靑)에 침입하므로 정병 500인을 거느리고 나아가 막았다. 그뒤 삼중대광 대제학(三重大匡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개성의 남대문종명(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은 뛰어난 필치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