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 자는 숙옥(叔玉). 증이조판서 충달(忠達)의 손자이고,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며 수침(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남곤(南袞), 김구(金絿), 김식(金湜) 및 조광조 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그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번씩 상식(上食)을 올렸다고 한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