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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02일(금) | ![]() |
乙巳年 庚辰月 辛未日 | 미래를 열어주는 정통역학 사이트 ㆍ 인터넷 사주 궁합 작명 전문 ㆍ 사주포럼 ㆍ www.SajuForum.com ♬ 즐겨찾기에 추가 |
동래정씨 시조 안일호장(安逸戶長) 정문도공(鄭文道公) 묘
언성군 김중만 장군대좌의 실증
면면(綿綿)한 복지의 땅 원주원씨(原州元氏) 세거지
동래정씨 시조 안일호장(安逸戶長) 정문도공(鄭文道公) 묘
청송심씨(靑松沈氏)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 안씨(安氏) 묘
보은(報恩)의 땅, 곡성(谷城)의 세우와용(細雨臥龍)
엽전 삼천냥에 백학은 날아가고
![]() 안일호장(安逸戶長) 정문도공(鄭文道公) 묘 신안동 김씨가 지금의 청운동인 장동에 모여 살면서 문벌을 이루어 장동김씨로 불리어 왔듯이 동래정씨는 조선중기 이후 남산 밑 회현동에 대대로 세거하며 혁혁한 가문을 형성하니 세칭 회동정씨로 불리어 왔다. 필자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일문의 흥성을 두고 풍수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자못 궁금한바 있어 오랫동안 명당대지로 소문이 나있던 부산시 양정동에 있는 정문도(鄭文道)공의 묘소를 어렵사리 기회를 만들어 비로서 찾아가 볼 수 있었다. 한반도의 관문.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469번지 화지산 밑 자좌오향의 명혈. 여느 명묘와 달리 수도권으로부터 벗어나 국토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적 사정으로 인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개마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왼편으로 동해의 망망한 푸른 바다와 오른편에 낙동강을 끼고, 이리구불 저리꿈틀 남으로 달리던 백두대간이 경주와 포항을 왼쪽에 두고 울산과 양산 어간에서 잠시 머물며 원효산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남해바다를 향하여 행도를 계속하니 계명봉, 금정산, 상학산을 연이어 만들고 어느덧 만덕고개를 건너뛰어 불웅령에 다다른다. 왼편으로 수영강을 바라보며 여기서 한 가지가 동남으로 떨어져서 부용같이 고운자태 화지산을 이룩하니 그 아래 조선 제일의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지자혈(池字穴)이 맺혀 있는 것이다. 묘소에 오르는 양편으로 조경이 잘 되었고 세가대족의 산소답게 재실이 웅장하고 잘 다듬어져 있다. 사위를 일별하니 득수는 건득병파(乾得丙破)에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하였는데, 좌우룡호가 청수하고 환포한 중에 주위의 사격이 특히 수발(秀拔)하니 손사방(巽巳方)에 황령산은 문필이 분명한데 곤신방에 엄광산과 수정산이 기고처럼 중첩하고 맞은편 백호너머로 정방(丁方)에 영도의 봉래산이 그림처럼 다가와 있다. 외명당에는 아파트가 들어찬 도심속이지만 혈장을 에워싸고 감도는 령기는 아직도 심신유곡이다. 조물주의 공력이 새삼 신묘하여 사격을 두고 중언부언하기가 참으로 송구하다. 주룡(主龍)은 자계룡(子癸龍)으로 화지산에서 출맥하여 잠시 동으로 가다, 다시 남쪽으로 좌선하여 유혈(乳穴)로 맺었다. 룡정을 가늠하니 부모산인 화지산으로부터 래맥은 풍후하고 수려하나 입수는 결린(結咽)이 미흡하고 돌올하지를 못해 펑퍼짐하게 퍼져있는데 경사가 있고 전대가 부실하여 토축을 쌓고 치산을 하였다. 묘를 쓴지 거의 일천년이나 되어가니 그동안 지형변화가 많았겠지만 대지명혈일수록 한가지 흠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보다. 혈성의 특징은 혈뒤 양쪽으로 바위가 있어 완연히 혈증을 드러냈는데 마치 눈(眼)처럼 생겼으니, 이로 미루어 굳이 이름을 짓자면, 교룡잠수(蛟龍潛水)가 아닐른지? 예전에는 오른쪽 백호 너머로 산봉우리 셋이 일렬로 있어서 전체 형국이 마치 못지자(池字)모양을 하여 지자혈(池字穴)이라 하였는데 최근 도시개발로 인해 삼수변에 해당하는 봉우리는 훼손이 되고 초행자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삼수변이 없더라도 청룡에 비하여 백호세가 현저히 왕성하고 백호방에 수려한 봉만이 중중고용하니 장손보다는 지손과 외손이 창성하겠는데 동래정씨 세계를 보면, 이점이 확실한 터이고 특히, 임당공의 외손인 장동김씨는 육십여년이나 영화의 극치를 누리고 허다한 인물이 배출되었으니, 화지산의 음덕과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더구나 청룡밖으로는 온천천이 내려와 내당수와 합해서 수영만으로 들어가는데, 그 중간에 배산이 가로 막고 있어 북신(北辰)이 도어 생기를 거두어 주니 더욱 가상하다. 어찌 만대영화지지가 아니겠는가? 이 명당이 점혈되기까지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고려 초기에 개경으로부터 그곳에 부임해온 현령은 공무가 끝나 한가할 때면 화지산 남녁언덕에 올라 주위를 살피고, 멀리 영도의 봉래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산기슭에 이르러 한참씩 앉아 말없이 있다 내려오곤 하였는데 당시 안일호장으로 현령을 수행하던 정문도공이 이를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그 현령이 임기가 끝나 돌아간 뒤에 이를 자신의 신후지지로 삼고 사후에 그곳에 묻혔다하니 세상일이 물각유주라 주인이 각각 따로 있는바, 그 원은 말없는 가운데 길안내를 해주고 간 것이다. 이곳에 정문도공이 묘를 쓴 후, 대대손손 자손이 번성하였다. 정통 풍수지리 / 양택풍수 음택풍수 / 풍수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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