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남궁원청(南宮元淸)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은 고려시대에 감물아현(甘勿阿縣 : 감물아는 함열의 옛지명) 출신으로 비서랑(秘書郞)을 역임하였다.
남궁원청은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에 사신으로 갔다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이듬해(977년)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귀국 후 991년(고려 성종 10년)에 대장군으로서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이북까지 몰아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고 감물아백(甘勿 阿伯)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함열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궁원청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 남궁득회(南宮得禧)를 1세조로 하였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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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남궁희(南宮憘) : 문과(文科) 명종4년(1549) 식년시 병과남궁지(南宮芷, 1530生) : 문과(文科) 선조1년(1567) 식년시 병과남궁활(南宮活, 1543生) : 문과(文科) 선조5년(1572) 별시2 병과남궁해(南宮楷, 1566生) : 문과(文科) 광해군4년(1612) 증광시 병과남궁집(南宮鏶, 1601生) : 문과(文科) 인조8년(1630) 식년시 갑과남궁찬(南宮璨, 1601生) : 문과(文科) 성종20년(1489) 식년시 병과남궁옥(南宮鈺, 1620生) : 문과(文科) 효종3년(1652) 증광시 병과남궁배(南宮培, 1624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정시 을과남궁성(南宮惺, 1777生) : 문과(文科) 정조19년(1795) 춘당대시 병과남궁후(南宮○, 1626生) : 문과(文科) 현종12년(1671) 정시 병과 등 모두 7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5명, 무과 5명, 생원진사시 50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항렬자
30世
東(동)○ | 31世
光(광)○ | 32世
珠(주)○ | 33世
鍾(종)○ | 34世
承(승)○ |
35世
○檍(억) | 36世
○炫(현) | 37世
○墉(용) | 38世
○鍊(련) | 39世
○源(원) |
40世
秀(수)○ | 41世
明(명)○ | 42世
基(기)○ | 43世
鈺(옥)○ | 44世
영(永)○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1세손은 30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함열(咸悅)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리었다. 신라가 점령하여 잠시 노산(魯山)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함열현(咸悅縣)으로 고쳐서 임피군(臨陂郡: 군산시 옥구읍 일대)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주(全州)의 관할로 들었다가, 1176년(명종 6)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09년(태종 9) 용안현(龍安縣)과 병합하여 안열현(安悅縣)으로 고쳤고, 1416년에 다시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두었다. 함라(咸羅)라고도 불리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함열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북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익산군에 폐합되면서 함열면이 되었다. 1979년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열남궁씨는
1985년에는 총 3,812가구 15,901명,
2000년에는 총 5,666가구 18,70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계파는 참봉공파( 奉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지평공파(砥平公派), 연안공파(延安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모현공파(慕賢公派)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