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사과(司果)를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13년 대호군에 재직중 순관(巡官)이 되어 신병을 칭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은 점과 또 순찰 뒤에도 병조에 보고하지 않고 사제(私第)로 바로 돌아갔으며, 행순(行巡) 때 갑사(甲士)를 대행시켰다고 병조 로부터 치죄되어 파직되었다. 그뒤 1426년(세종 8) 정주목사(定州牧使) 재직중 김도련(金道鍊)의 노비를 남수(濫受)한 사건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에 복직되었으나, 1430년 동지총제로 사헌부 로부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 아첨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또 다시 파직되었다. 1435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39년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경주부윤으로 체직되었고, 142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사과(司果)를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13년 대호군에 재직중 순관(巡官)이 되어 신병을 칭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은 점과 또 순찰 뒤에도 병조에 보고하지 않고 사제(私第)로 바로 돌아갔으며, 행순(行巡) 때 갑사(甲士)를 대행시켰다고 병조 로부터 치죄되어 파직되었다. 그뒤 1426년(세종 8) 정주목사(定州牧使) 재직중 김도련(金道鍊)의 노비를 남수(濫受)한 사건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에 복직되었으나, 1430년 동지총제로 사헌부 로부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 아첨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또 다시 파직되었다. 1435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39년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경주부윤으로 체직되었고, 142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