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강후(康候)시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의 둘째 아들로서 기원전 198년에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고조선시대 기자조선의 시조)로부터 강씨 성을 받았다. 고려 명종때 80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이 신천에 살다가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신성은 신천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후손이 본관을 신천으로 하였다.
- 북제주 조천서원에서 제향한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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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강칭(康○, 1542生) : 문과(文科) 선조18년(1585) 식년시 병과강정하(康正夏, 1731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식년시 병과강열(康說, 1531生) : 문과(文科) 선조1년(1567) 식년시 병과강우량(康友諒, 1656生) : 문과(文科) 숙종22년(1696) 식년시 병과강국룡(康國龍, 1782生) : 문과(文科) 순조14년(1814) 식년시 병과강시진(康時進, 1569生) : 문과(文科) 광해군2년(1610) 식년시 병과강신(康愼, 1569生) : 문과(文科) 세종2년(1420) 식년시 동진사강홍거(康鴻擧, 1855生) : 문과(文科) 고종12년(1875) 별시 을과강문상(康文祥, 1733生) :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식년시 병과강취승(康就昇, 1754生) : 문과(文科) 정조16년(1792) 식년시 병과 등 모두 6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0명, 무과 2명, 생원진사시 40명, 역과 3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항렬자
21世
온(溫) 익(益)
| 22世 량(良) 수(秀)
| 23世 공(恭) 태(泰)
| 24世 검(검) 상(相)
| 25世 형(炯) 병(炳)
|
26世 주(周) 기(基)
| 27世 현(鉉) 종(鐘)
| 28世 수(洙) 순(淳)
| 29世 영(榮) 주(柱)
| 30世 하(夏) 환(煥)
|
31世 재(在) 교(敎)
| 32世 흠(欽) 선(善)
| 33世 한(漢) 락(洛)
| 34世 모(模) 빈(彬)
| 35世 희(熙) 로(魯)
|
36世 규(奎) 중(重)
| 37世 석(錫) 진(鎭)
| 38世 호(浩) 원(源) | 39世 - | 40世 -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2세손은 21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신천신천(信川)은 황해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는 승산군(升山郡)이었고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라고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두 지역 모두 중반군(重盤郡)에 소속되었고, 궁홀은 궐구(闕口)로 개칭되었다. 승산과 궐구는 태봉 때 또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 전에 신주(信州)와 유주(儒州)로 개칭된 것으로 짐작된다. 신주는 995년(성종 14) 방어진으로 바뀌었다가 1012년(현종 3) 폐지되고 황주(黃州)의 속현이 되었다. 유주는 1018년 풍주(豊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신천으로 개칭되어 현감을 두었다가 1469년(예종 1)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09년에 문화군과 병합되었다. 1952년에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월면·산천면·용진면이 안악군으로 이관되었으며, 초리면·궁흥면의 일부를 송화군에 편입시키고 재령군 서초면의 일부와 삼천군 궁흥면·초리면·문화면의 일부를 통합해 군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3년에 재령군 용평리와 삼천군 덕천리의 일부, 1954년에 재령군 청천리의 일부, 1958년에는 벽성군의 온천리·도락리·냉정리·지남리가 이군에 이관되었다. 또한 1967년에는 온천리를 장재리로 개칭했고 온천리·송오리·원암리의 일부를 각각 분리·통합하여 온천리를 만들었다. 1977년에 봉황리를 새길리로, 석봉리를 새날리로 개칭하고 근로자리를 신설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천강씨는
1985년에는 총 12,286가구 50,733명,
2000년에는 총 13,909가구 44,25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