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나총례(羅聰禮)당 태종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나지강(羅至强)이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發羅縣 : 나주의 옛이름)에 정착한 후 신라때에 벼슬이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다. 그후 신라 효공왕 때에 나경(羅璥)이 나주사찬으로 봉해지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 후 후손의 기록이 없어져서 고려 초에 삼한벽상 일등공신인 나총례를 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영조때에 무신흉변의 화를 면하려고 나주의 옛이름인 금성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총례의 후손이면서 아직도 본관을 옛 본관인 나주를 바꾸지 않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계통도 있고 안정, 군위, 수성 등으로 본관을 하는 계통도 있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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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나홍순(羅弘淳, 1829生) : 문과(文科) 고종2년(1865) 식년시 병과나경성(羅經成, 1847生) : 문과(文科) 고종29년(1892) 별시 병과나득주(羅得周, 1755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정조13년(1789) 식년시 삼등나원석(羅元錫, 1795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4년(1867) 식년시 삼등나희(羅僖, 1617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효종1년(1650) 증광시 이등나경(羅儆, 1620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인조26년(1648) 식년시 삼등나원집(羅元緝, 1772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13년(1813) 증광시 삼등나언(羅偃, 1609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효종3년(1652) 증광시 삼등나정순(羅晸淳, 187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나민(羅○, 1623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효종1년(1650) 증광시 삼등 등 모두 1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생원진사시 13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항렬자
21世
彦(언) 德(덕) 用(용) | 22世 緖(서) | 23世 友(우) 漢(한) | 24世 重(중) 以(이) 萬(만) | 25世 載(재) 聖(성) |
26世 壽(수) 應(응) 景(경) | 27世 讚(찬) 佐(좌) | 28世 弼(필) 得(득) | 29世 元(원) 彦(언) 根(근) | 30世 成(성) 秉(병)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2세손은 21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금성(錦城)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의 옛 이름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금성나씨는
1985년에는 총 9,490가구 39,905명,
2000년에는 총 12,869가구 40,49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