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윤존부(尹存富)시조 윤존부(尹存富)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사람이나 그후 6세 윤환(尹桓) 까지는 자료가 전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8세손 윤광전(尹光琠)이 고려 공민왕 때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윤단봉(尹丹鳳)과 윤단학(尹丹鶴) 두 형제를 데리고 강진으로 피하여 살게되어 본관을 해남으로 하고 윤광전을 1세조로 하고있다.
- 윤광전의 묘소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에 있으며 음력 9월 9일에 향사한다.
인물
- 윤구(衢) : 중종 때 호당에 뽑히고 사성을 지냈다.
- 윤의중(毅中) : 윤구의 아들. 대사헌·대사간·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윤선도(善道) : 윤의중의 손자. 시조의 대가로 유명하며, 한성서윤, 예조참의, 중추부첨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남인의 거두로서 예송 때는 송시열(宋時烈) 등과 대립하였다.
- 윤두서(斗緖) : 윤선도의 증손. 숙종 때 화백으로서 심사정, 정선과 함께 3재로 일컬어졌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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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윤지눌(尹持訥, 1762生) : 문과(文科) 정조14년(1790) 춘당대시 병과윤복(尹復, 1762生)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2 을과윤의중(尹毅中, 1524生) : 문과(文科) 명종3년(1548) 별시 병과윤행(尹行, 1524生) : 문과(文科) 중종26년(1531) 식년시 병과윤홍중(尹弘中, 1524生)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증광시 병과윤선도(尹善道, 1587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증광시 병과윤인미(尹仁美, 1607生) : 문과(文科) 현종3년(1662) 증광시 병과윤광계(尹光啓, 1559生) : 문과(文科) 선조22년(1589) 증광시 병과윤지범(尹持範, 1752生) : 문과(文科) 정조1년(1777) 증광시 병과윤유기(尹惟幾, 1554生) : 문과(文科) 선조13년(1580) 별시 병과 등 모두 6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8명, 무과 8명, 생원진사시 40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항렬자
23世
鍾(종)○ | 24世
○浩(호) | 25世
柱(주)○ | 26世
○夏(하) | 27世
在(재)○ |
28世
○鉉(현) | 29世
泳(영)○ 淳(순)○ | 30世
○相(상) ○植(식) | 31世
炳(병)○ | 32世
○培(배) |
33世
鎔(용)○ | 34世
○洙(수) | 35世
東(동)○ | 36世
○烈(열) | 37世
基(기)○ |
38世
○鐸(탁) | 39世
海(해)○ | 40世
○林(임) | 41世
炅(경)○ | 42世
○均(균)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4세손은 23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해남(海南)은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마한 때에는 구해국(狗奚國)이었다고 한다. 538년(백제 성왕 16)에 새금현(塞琴縣)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침명현(浸溟縣)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 康津)의 관할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해남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 영암군(靈巖郡)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설치되면서 독립하였다. 1409년(태종 9)에 왜구의 극성으로 육지에 옮겨온 진도현(珍島縣)을 병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라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다시 진도와 분리하여 현감을 두어 해남현이 되었고, 또 수군전라우수영을 두어 남쪽 해상 방비의 요지로 삼았다. 1448년(세종 30) 황원현(黃原縣)·옥산현(玉山縣)·죽산현(竹山縣)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편하였다가 다시 해남현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하면서 부근 도서를 완도군으로 이속시켰다. 1955년에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해남윤씨는
1985년에는 총 11,519가구 48,786명,
2000년에는 총 17,366가구 55,62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