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배씨(慶州裵氏)
유래
  • 시조 : 지타(只他)
  •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금산 가리촌장(金山 加利村)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하였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이름이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었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라고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성종1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지타(태사공)의 후손이었으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가 나뉘어져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 흥해 배씨, 협계 배씨, 화순 배씨, 함흥 배씨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파도 있다.
  •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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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배한흥(裵漢興, 1679生) : 무과(武科) 숙종25년(1699) 식년시 병과
  • 배험련(裵險連, 1583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
  • 배용(裵龍, 1598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
  • 배산복(裵山福, 1616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
  • 배천남(裵天男, 1582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
  • 배경도(裵景度, 1621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
  • 배업룡(裵業龍, 1622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
  • 배상익(裵尙益, 1581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광해군8년(1616) 증광시 삼등
  • 배상익(裵尙益, 1581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광해군8년(1616) 증광시 삼등
  • 배유화(裵幼華, 1610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효종3년(1652) 증광시 삼등
  • * 모두 1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7명, 생원진사시 3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 본관 연혁
  •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
  •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배씨는
    1985년에는 총 21,361가구 90,034명,
    2000년에는 총 7,068가구 22,06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