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야정씨(瑯琊鄭氏)
유래
  • 시조 : 정선갑(鄭先甲)
  • 시조 정선갑(鄭先甲)의 자는 시인(始仁)으로 명나라의 진사를 지냈으며 중국 낭야에서 출생했다.
    정선갑은 명나라 세종 때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낸 정문겸(鄭文謙)의 증손자로 1617년 산동성(山東省) 낭야에서 출생하여 진사(進士)로 있다가 1644년 명(明)나라가 청(淸)에 멸망되자 나라를 구하려 의거(義擧)를 하려다가 청군(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수용중인 그 심양에서 풍삼사(馮三仕), 황 공(黃功), 왕이문(王以文) 등 9의사(九義士)와 함께 동지(同志)로 결합(結合)하였는데, 이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의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 일행을 만나 함께 힘을 합칠것을 약속하였다.
    이듬해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조양루(朝陽樓) 남쪽 황조인촌(皇朝人村 :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 1번지 부근)에 살면서 효종(孝宗 : 봉림대군)과 비밀리에 북벌할 계획을 추진중 1659년(효종 10년) 왕(王)의 급서(急逝)로 북벌 계획이 좌절되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조선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150여 년간 황조인촌에 집단거주하면서 조정에서 베푸는 특별 후대(厚待)를 받아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明)나라 신종(신宗)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肅宗)이 비원(秘苑)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배향할 때
    시조 정선갑을 포함한 9의사(九義士)를 함께 배향하는 은전(恩典)이 내렸고, 대보단 수직관직(守直官職)을 9의사 자손에게 대를 물리도록 하였다.

    후손들이 시조의 출신지를 따라 본관을 낭야로 하였다.
  • 세거지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설운리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본관 연혁
  • 본관소재지 :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 낭야(瑯琊)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부(淸州府) 제성현(諸城縣) 근방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한(漢)나라 때부터 화려한 왕도정치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낭야정씨는
    1985년에는 총 194가구 871명,
    2000년에는 총 335가구 1,08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