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전주(田柱)시조 전주(田柱)의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으로 고려 왕족 순흥군 왕승(順興君 王昇)의 아들로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왕씨 말살책에 따라 공주목(公州牧)의 일신역(馹新驛)으로 유배되었다가 1394년(태조 3년)에 참사를 당하였다.
전주의 손자 전흥(田興) 또한 태종 이방원에게 억류되어 있었으나, 그의 남다른 두뇌와 용기등 출중한 능력은 곧 이방원의 눈에 띄여 그를 심복참모로 기용하여 1,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태종은 그에게 전흥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후 정사좌명원종공신에 책록하였고, 판중추원사에 올라 남양전씨의 기틀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전주가 외직인 강령부승을 지낸 연유로 지명을 따서 남양을 본관으로 하고 전흥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물
전흥의 다섯 아들중 전가생(田稼生)과 전주생 두아들이 한날 과거에 급제하여 장안의 화제가 됐다고 한다.
전주생의 아들 전림(田霖)은 남양전씨의 이름을 다시한번 떨쳤다. 세조때 무과에 급제한 그는 포도대장, 전주판관, 한성판윤등 여러관직을 거치고 중종반정에도 참여 공신이 됐다. 불의를 용납치 않는 강직한 자세로 조선초기 법질서가 가장 확립된때는 전림이 법을 맡았을때라는 평을 들은 인물. 그의 원칙주의는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회산군이 규정을 어겨 호화롭게 집을 짓자 가차없이 문책, 집을 뜯어 고치게 했을 정도이다. 중종4 년 지중추사로 돌아가자 위절공(威節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남양전씨의 역사에 특이한 한장을 기록한 사람은 도술가 전우치이다. 전림의 당질인 전우치는 을류사화에서 조광조의 일당으로 몰려 수배를 받게되자 세상을 등지고 산에 들어가 수도끝에 신선의 비술을 깨쳤다고 전한다. 그가 세상에서 숨어버린뒤 관의 추궁이 두려워진 친척들은 그가 남양전씨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바람에 한때 전우치는 담양전씨로 잘못알려지기도 했으나 근래에 남양전씨로 확인되었다고한다. 이무렵부터 남양전씨는 중앙정치무대와 거리를 두고 초야에 묻혀 살게 되었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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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전가생(田稼生)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전가생(田稼生) : 문과(文科) 세종18년(1436) 중시 을과전조생(田稠生)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전응룡(田應龍, 1610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전희길(田希吉, 1608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전해(田瀣, 1600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인조2년(1624) 식년시 삼등전수원(田遂元, 170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영조16년(1740) 증광시 삼등전우성(田禹成, 170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중종2년(1507) 식년시 삼등전수형(田遂亨, 1708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영조16년(1740) 증광시 삼등* 모두 9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무과 2명, 생원진사시 4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세거지
충남 논산군 성동면 우곤리 속칭 서당골은 5백여년 남양전씨의 못자리 마을이다.
시조 전흥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자리잡은뒤 후손들이 마을을 이뤄 서당골과 이웃 개사리 두 마을에 130여 가구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들과 바다의 식량과 땔감 그리고 교통이 편리하고 풍성해 살기 좋은 명당이다. 재를 넘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엔 전우치가 심었다는 5백년 수령의 은행나무 거목이 우람스런 모습으로 팔을 펼치고 섰다. 남양전씨의 숱한 인물들이 마을을 대물려지켜 인근에서도 양반마을로 꼽혀왔다.
마을엔 보물로 지정된 전흥의 교지등 많은 유적, 유물도 남아 후손들이 긍지가 더하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수원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에 당항성(唐項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고, 쌍부(雙阜)·정송(貞松)·안양(安陽) 등을 관할하였다.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 水原)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 水原)의 관할에 들었고, 후에 인주(仁州: 仁川)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고 재양현(載陽縣: 安陽縣)을 관할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 익주(益州)로, 후에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로,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으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가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수원진을 남양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별호는 영제(寧堤)·과포(戈浦)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가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수원의 두입지(斗入地)인 팔탄·분향·장안·초장·압정·오정 등 6개면이 남양군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양군이 폐지되어 수원군에 병합되었다. 이때 일부 면이 은덕·쌍수·마도·송산·서신·비봉면으로 통합되고 수원군에서 편입했던 6개면은 팔탄면·장안면·우정면으로 통합되어 다시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주변의 20개 리를 편입하였으며, 1967년 6월 서울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되었다. 1983년 전국행정구역 조정으로 용인시 수지면(水枝面) 하리(下里)·이의리(二儀里)의 2개 리가 편입되었다. 1987년 화성군 매송면(梅松面) 금곡리(金谷里)·호매실리(好梅實里)가 편입되었다. 1988년 7월 장안구·권선구 2개 구가 신설되었고, 1993년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권선구에 입북동·당수동을, 팔달구에 영통동이 각각 신설되었다. 1995년 권선구 곡선동이 권선동과 곡선동으로 나뉘고, 화성군 태안읍 신리와 망포리 일원이 팔달구 매탄3동에 편입되었다. 2003년 11월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2004년 현재 4구 4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양전씨는
1985년에는 총 3,007가구 13,368명,
2000년에는 총 1,456가구 4,66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