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이만영(李萬英)시조인 이만영(李萬英)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조 때 공신으로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내고, 인천백(仁川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이 고려 공민왕 때 순찰사(巡察使)로 전국을 순방하다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살았고, 손자 이징석(李澄石)이 태종때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예조판서(禮曺判書)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양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양산으로 하였다.
인물
조선시대 인물로 중추부사를 역임한 이전생을 비롯하여 병조판서 이징규(李澄圭), 사직 이윤조(李胤祖) 금산군수 이윤환(李胤環),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이재(李栽), 첨정(僉正) 이몽란(李夢鸞), 교위(校尉) 이식(李植),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이종(李種), 부호군 이성춘(李聖春) 등을 들 수 있다.
이징석(李澄石)은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1421년 상호군을 거쳐 경상도 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로 1433년 도원수(都元帥) 최윤덕(崔潤德)의 부장(副將)이 되어 파저강의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그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45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5년 세조를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양산군에 봉해졌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지낸 이징옥(李澄玉)은 어려서부터 무용(武勇)이 출중했으며 세종 때 경원진첨절제사(慶源鎭僉節制使), 판회영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事),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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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시주(李時柱, 1604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이명(李明, 1574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이제림(李悌林, 157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세종29년(1447) 식년시 삼등이상보(李尙輔, 1647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16년(1690) 증광시 삼등이상보(李尙輔, 1647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17년(1691) 증광시 삼등이상륜(李尙輪, 1659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7년(1681) 식년시 이등* 모두 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2명, 생원진사시 4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세거지
- 경상남도 양산군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양산(梁山)은 경상남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665년(신라 문무왕 5) 이곳에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구주(九州)의 하나인 양주(良州)로 개편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주(梁州)로 개칭했으며, 성종 때에는 방어사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양주군으로 고쳤고, 충렬왕 때 잠시 밀성군에 폐합되었다가 곧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의춘(宜春)·순정(順正)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양산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 양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기장군이 동래군에 통합되었고, 1973년에 동래군이 양산군에 통합되었다. 1979년에는 양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6년에는 양산군이 시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산이씨는
1985년에는 총 1,100가구 4,517명,
2000년에는 총 1,411가구 4,50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