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여선재(余善才)시조 여선재(余善才)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었다. 그가 1103년(숙종 8)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의춘군(宜春君)에 봉하였다.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이름인데, 여선재의 후손들이 의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를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여상규(余尙珪, 1595生) : 문과(文科) 인조5년(1627) 식년시 병과여후(余○, 1677生) : 문과(文科) 숙종31년(1705) 식년시 병과여효온(余孝溫, 1677生)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여광필(余匡弼, 1677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연산군7년(1501) 식년시 삼등여하진(余夏鎭, 1786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28년(1828) 식년시 삼등여동삼(余東三, 1871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31년(1894) 식년시 삼등여진(余○, 166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36년(1710) 증광시 삼등여계복(余繼福, 1664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중종8년(1513) 식년시 삼등여극(余極, 1685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34년(1708) 식년시 삼등* 모두 9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생원진사시 6명)※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세거지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이미 의령 여씨가 하동 지역의 세력 가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연산군 때 여승탁(余承鐸)이 의령에서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로 옮겨 왔다.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는 1750년(영조 26) 무렵 여승탁의 후손이 들어와 터를 잡으면서 의령 여씨의 대표적인 세거지가 되었다.
항렬자
29世
○엽(燁) ○섭(燮) | 30世
○규(奎) ○준(埈) | 31世
○호(鎬) ○석(錫) | 32世
태(泰)○ 홍(洪)○ | 33世
○모(模) ○환(桓) |
34世
찬(燦)○ 형(炯)○ | 35世
○기(基) ○동(垌) | 36世
용(鎔)○ 동(銅)○ | 37世
○원(源) ○진(津) | 38世
주(株)○ 재(栽)○ |
39世
○훈(焄) ○형(熒) | 40世
준(埻)○ 성(城)○ | 41世
○종(鍾) ○진(鎭) | 42世
홍(泓)○ 호(浩)○ | 43世
○영(榮) ○근(根) |
44世
주(炷)○ 현(炫)○ | 45世
○원(垣) ○용(墉) | 46世
은(銀)○ 수(銖)○ | 47世 | 48世 - |
※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0세손은 29대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의령의령(宜寧)은 경상남도 중앙부의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장함현(獐含縣)인데 757년(경덕왕 16)에 의령현으로 개칭하여 함안군의 영현을 삼았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晉州)에 편입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를가 파견되어 신번현(新繁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으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의령군으로 개칭되어 진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의령군이 되었다. 1979년에 의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의령여씨는
1985년에는 총 3,441가구 14,132명,
2000년에는 총 5,180가구 16,47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하동군 하동읍 화심마을 양심재(養心齋)는 의령 여씨들이 입향조를 받들고 후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건립한 학숙소를 겸한 재실이다. 최익현(崔益鉉)은 양심재에 들렀다가 '양심재염심자(養心齋拈心字)'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화심마을에는 만석꾼으로 알려진 참봉 여종엽(余宗燁)이 살았던 집터와 잔존 건물이 남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