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숙(汝淑). 호는 수촌(壽村). 조부는 예조좌랑(禮曹左郞)과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송희진(宋希進)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겸 전중어사(司憲府監察兼殿中御使)를 지낸 송국사(宋國士)이다. 일찍부터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향시(鄕試)나 경시(京試)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과거에서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유학의 정통은 주자(朱子)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이어진다고 하여, 항상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힘써 배우고 강론하였다. 송시열이 당쟁으로 인해 귀양길에 오르자, 자신이 지은 수촌정사(壽村精舍)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82년(숙종 8) 12월 19일 향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은 다음 날 황해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현재 대전시 동구 이사동 인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에 묻혔다. 저서로는 항상 자신이 음영(吟詠)하던 것을 묶어 만든 '수촌난고(壽村亂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