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강유후(姜裕後)
  • 진주강씨(晋州姜氏),  출생~사망 : 1606 ~ 166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수(汝垂). 호는 옥계(玉溪). 아버지는 현령 진소(晉昭),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소속되었다. 그뒤 승정원주서, 전적,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기장현령(機張縣令)의 외직으로 나갔다.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655년(효종 6)에 정언에 이르렀다. 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경기도사가 되었다가 청주목사로 전직되어, 포곡(逋穀) 2만섬을 서민의 책임이 아니라 하고서 부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용단을 보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1659년(효종 10) 지평을 거쳐 안후열(安後說), 김수흥(金壽興), 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암행어사로 선발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그해 지평이 되었으나 패소(牌召)에 나가지 않았다 하여 출관(黜官)을 요구하는 김익렴(金益廉)의 탄핵을 받았으며,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은 현종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아뢰는 소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년) 정주목사로 나가 강계부사, 의주부윤을 등을 역임하였다. 정주목사 시절에는 부호들이 차지한 전답을 서민들에게 돌려주는 한편, 청나라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여 기개를 보였다. 강계부사가 되어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하여 당시 국금(國禁)이었던 채삼(採蔘)을 허락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평안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러한 청조(淸操)가 인정되어 숙종 조의 청백리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