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상일(李尙逸)
  • 벽진이씨(碧珍李氏),  출생~사망 : 1600 ~ 167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림(汝林). 호는 용암(龍巖). 현령 민선(敏善)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8년(광해군 10)광해군 때 난정을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에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입시(入侍)하여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써내려가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말 한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감사를 대신하여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명을 잡았으나 그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거론하여 김자점을 귀양가게 하였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함으로써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 승지,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에는 황해도감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이었던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하여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충청도 청풍부(淸風府)에 은거하며 주민을 위한 구휼사업, 수리개발로 수도전(水稻田)을 개척하여 농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고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는 '삼인사적 三仁事蹟'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