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소(朴紹)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493 ~ 15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이조정랑 조년(兆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써 식견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 '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으며 그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인(舍人),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사간원사간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하여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뒤에도 여러번 탄핵하여 그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