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신지(申之).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헌납, 장령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적세(敵勢)를 잘못 상계(上啓)하여 물러나서 의론(議論)을 기다렸다. 장령으로 복직된 후에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성격이 흉활(兇猾)하여 화심(禍心)을 품고, 이권(利權)을 좋아하여 사림에 죄를 얻고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지 오래되었으며, 유성룡(柳成龍)이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릇되게 한 죄를 범하였다고 탄핵하였다. 그리고 매관납속(賣官納粟)의 병폐를 시정하도록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장령으로서 시강원(侍講院)에 입직하였으나 병이 심하여 오래 있지 못하였다. 1616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배를 타고 명나라로 가던 도중에 노환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