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신백(愼伯). 호는 정곡(靜谷). 감찰 초(礎)의 아들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검열, 봉교, 대교, 형조정랑을 거쳐 성균관전적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사헌부집의,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미워하는 광해군에게 김제남(金悌男)을 비롯한 서인(西人), 남인(南人)계통의 사람들을 탄핵하는 데 관여하였다. 그뒤 사간으로 폐모론에 가담하고, 남이공(南以恭), 이원익(李元翼) 등을 탄핵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인조 때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가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할 때 감사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쳤으므로 삭탈관작되기도 하였다. 1628년(인조 6)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가도록 되었으나, 마침 모문룡(毛文龍)이 사신일행을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은과 인삼을 빼앗으므로 되돌아왔다. 다음해에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 가서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으나, 사헌부에서 국가의 체모를 손상하고 경솔하게 행한 과실이 많다고 탄핵하였다. 그뒤 예조참의, 선산부사, 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고, 1635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