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립(時立). 호는 포세(逋世). 의영고령(義盈庫令) 개윤(愷胤)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 병조좌랑, 고창현감 등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도호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적장 가토(加藤淸正)의 군대가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을 때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비롯하여 수십인을 포박하여 왜군에 투항하였는데, 이때 그도 체포되었다. 적장이 강화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왕자와 대신에게 강제로 서명(署名)하게 한 뒤 그 문서를 그에게 전달하면서 행재소(行在所)인 의주로 가게 하였다. 행재소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짓으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세번이나 소를 올렸는데, 왕자의 급박한 상황을 말하고 잡혀 있는 대신들의 전언을 상세히 아뢰었다. 적의 문서를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왕자를 구출하는 것임을 말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여줄 것을 간언하였다. 그의 충성심이 받아들여져 사형은 면하고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