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극(時極). 호는 청계(淸溪).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성벽(金成璧)이다. 담양부(潭陽府)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기개가 넘쳐 세간의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수은(睡隱) 강항(姜沆),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과 교유하였다. 1585년(선조 18)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귀후서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인데,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그의 처남이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처남인 김덕령 부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김덕령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반역죄로 연루되었을 때 김응회도 함께 붙잡혔는데,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처남 김덕령의 충성스러움을 주장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옥에서 나온 후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산(坡山)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던 성혼(成渾)에게 글을 올려 문안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이때 어머니와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도 함께 순절하였다. 광해군 때 그의 충효를 가상히 여겨 정려문(旌閭門)을 세웠으며, 수북면(水北面) 구산사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