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 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신. 할아버지는 전주부윤 지귀(知歸)이며, 아버지는 성균관전적 기(璣), 어머니는 능성현령(綾城縣令) 임옥산(林玉山)의 딸이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琛)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정자 겸 경연전경(正字兼經筵典經),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1518년 홍문관박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하여 구례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이해 2월 구례현감으로 제수될 때 왕이 인견하고 학교를 일으키라고 교시하자, 그는 '근사록 近思錄'을 간행, 보급하여 지방학교 진흥에 노력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 경성교수(鏡城敎授)를 지내고, 1533년 전적으로 제배된 뒤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이르렀다. 43세에 병을 얻어 남원부 흑성산(黑城山)에 안치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성품은 암약(暗弱)하여 강직성과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간특하지 않아 사화 때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