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송시철(宋時喆)
  • 여산송씨(礪山宋氏),  출생~사망 : 1610 ~ 167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보(叔保). 호는 설촌(雪村). 예조참의 극인(克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정 김흡(金洽)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 상서원부직장(尙瑞院副直長),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사평(司評), 공조좌랑 등을 지내고,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정언, 고산찰방(高山察訪), 황해도사(黃海都事), 예조정랑 등을 거쳐 장령에 올라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임하면서 송준길(宋浚吉)이 경연(經筵)에서 시강할 때 많은 보조를 하였다. 그뒤 사성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밀양부사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상의원(尙衣院), 사복시(司僕寺), 장악원(掌樂院), 봉상시(奉常寺), 군자감(軍資監)의 장을 거치면서 헌납, 장령, 집의, 사간을 여러 번씩 역임하였는데, 대각(臺閣)에 커다란 의론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참여하여 정론(正論)으로 시비를 가렸다. 1667년 동부승지가 되고 좌승지, 형조, 공조의 참의를 거쳐 원주목사로 내려가 향교를 수축하고 늠희(○○)를 지급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켰으며, 흉년에는 요역(○役)과 부역(賦役)을 덜어주어 민심을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