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권사민(權士敏)
  • 안동권씨(安東權氏),  출생~사망 : 1557 ~ 16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수언(粹言). 호는 매헌(梅軒).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권계중(權繼中)이고, 부친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던 권덕린(權德麟)이다. 문예(文藝)에 뛰어났고 성리학을 탐구하여 이름을 드러났고, 천거되어 일곱 고을의 훈도(訓導)와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일으켜 영천을 지나 대구 공산 까지 이르러 많은 왜적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다. 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군사와 연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며 거듭 큰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당시 그가 전투에 임했던 자세는 곽재우에게 말한 '외로운이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의리상 적에게 욕을 당할 수 없나니 섶을 많이 쌓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불을 질러 성과 함께 타서 죽어야 한다'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곽재우 장군도 그의 충의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친의 부음을 받고 여러 사람들에게 통곡하면서 작별하며 말하길 '부모를 모심에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나라를 위하여 죽지 못하니 한스럽다. 공들은 적을 퇴거하기 전까지 잘 방위하기를 부탁 한다'고 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떠났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때 하루는 저녁에 호랑이가 묘 앞에서 울부짖으니, 그가 나가서 슬피 울며 말하길 '너는 모든 짐승의 영장(靈長)으로 어찌 사람의 어버이를 놀라게 할 수 있는가○'하니, 호랑이가 곧 머리를 수그리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다. 언양군수(彦陽郡守)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81년(정조 5)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는 전쟁 때에 겪은 어려웠던 실상과 의병들의 활동 상황,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기록한 서찰을 도체찰사 인 유성룡(柳成龍)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841년(헌종 7)에 암행어사 별단(別單)과 관찰사가 포창하는 장계에 의하여 조정에서 좌승지(左承旨)로 추증하고, '국가를 위하여 창의하고 산성을 지키며 충성을 다 바쳤다(爲國倡義, 守成效忠)'라는 여덟 글자를 하사하였다. 1844년(헌종 10)에 효행(孝行)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졌다. 경주 옥연사(玉淵祠)에 배향되었다. 후에 후손에 의해 '매헌실기(梅軒實記)'가 국역으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