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 아버지는 예조좌랑 예손(禮孫)이고, 어머니 노씨(盧氏)는 우현(佑賢)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31년(중종 26) 진사가 되고, 153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가독서를 하였다. 사간원헌납이 된 뒤 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육조에서 활동하였다. 사헌부 에서는 지평 등을 거쳐 일곱차례나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홍문관 에서는 수찬 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제학 까지 승진하였으며, 승정원 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이르기까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다. 만년에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의 판서 등 육조의 장관을 차례로 두루 역임하였다. 1543년 10월 경연에서 관학 교육의 쇠퇴 원인으로 학관자격의 불충실, 학교시설의 미비, 사습(士習)의 사치 등을 지적하고, 이 폐습을 개선하여 관학을 진흥하도록 건의하였다. 1544년 헌납 재직시에는 대사간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왕의 어진 정사와 고른 은혜를 강조하였다. 1555년(명종 10)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태극도(太極圖)를 진강하였고, 언로 개방, 실추된 정령(政令) 및 습속의 개선, 내수사의 형집행 부당성과 천인들의 동반정직(東班正職)임명의 불가함, 군왕의 학술진흥 등을 진술하였다. 1555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대명회전 大明會典'의 반입, 세자택봉 등의 문제를 건의한 바 있다. 문장에 뛰어나 김주(金澍), 민기(閔箕), 정유길(鄭惟吉), 심수경(沈守慶) 등과 함께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부훤당유고' 1책이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