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산립(山立). 호는 노파(盧坡). 지중추부사 약동(約東)의 후손이다. 일찍이 문재가 뛰어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늙음에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기로 결심하여 과업을 포기하였다. 그의 행의(行誼)를 정온(鄭○)이 조정에 알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그뒤 구성부사,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한편, 1613년(광해군 5)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무고로 사사(賜死)된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구성부사로 나갈 때는 이러한 자에게 관방(關防)을 맡기면 민심이 흩어질 것이니 아예 벼슬을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삼가(三嘉)의 고암사우(古巖祠宇)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