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원(士元). 호는 일구당(一丘堂). 부사직(副司直) 김벽(金碧)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낸 통훈대부(通訓大夫) 김천우(金天宇)이다. 스승 성운(成運)이 아들이 없어 조카사위인 그를 후사로 삼았다. 1579년(선조 12)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 생원(生員) 1등에 합격하여 노성현감(魯城縣監)을 지냈다. 그 후 성운의 문집 편찬에 몰두하던 중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마을에 침입한 왜적과 맞서 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당시 부인 전주유씨(全州柳氏)는 남편을 구하려다 순절하였고, 며느리 고령신씨(高靈申氏)도 피난 중 왜적을 만나 자결하여 일가 셋이 한 날 순절하였다. 1598년(선조 31)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고, 유씨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었으며 며느리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정려가 내려졌다. 그가 수집하여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성운의 문집은 1603년(선조 36) 아들 김덕민(金德民)이 유근(柳根) 등과 함께 '대곡집(大谷集)'으로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