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외(士畏). 호는 동리산인(東籬散人), 파옥진인(破屋陳人). 개성 출신. 아버지는 김현도(金玄度)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보령현감이 되었다. 그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역적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이를 경축하는 감사의 전문(箋文)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거절하자 노여움을 사 구금당하였으나 조금도 굽히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예안현감이 되었다가, 전적, 직강(直講) 등 경직을 역임하고 다시 옹진군수로 나갔으나 고관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했다. 그는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은 최립(崔○)의 문인으로서 송도인(松都人)의 문사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보령현감이 되었다. 그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역적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이를 경축하는 감사의 전문(箋文)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거절하자 노여움을 사 구금당하였으나 조금도 굽히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예안현감이 되었다가, 전적, 직강(直講) 등 경직을 역임하고 다시 옹진군수로 나갔으나 고관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했다. 그는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은 최립(崔○)의 문인으로서 송도인(松都人)의 문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