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안(士安). 아버지는 예조참판 권주(權柱),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칙(李則)의 딸이며, 이황(李滉)의 장인이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폭로한 언문투서사건이 일어나자, 앞서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자손들의 짓이라 하여 신국(訊鞫)을 당한 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풀려나왔다. 그뒤 조정에서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할 때 그의 아버지는 신원이 되고 자신도 음보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뒤 다시 집경전(集慶殿), 순릉(順陵), 후릉(厚陵)의 참봉을 역임한 뒤, 1517년(중종 12)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에 승진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훈구세력에 의해 축출당한 뒤 1521년 사림파와 친밀했던 안처겸(安處謙)이 훈구대신을 해치려 했다는 무옥(誣獄)이 일어나서 남은 사림파가 다시 쫓겨날 때 아우 권전이 장살되면서 그도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고신(告身)을 되돌려받았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폭로한 언문투서사건이 일어나자, 앞서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자손들의 짓이라 하여 신국(訊鞫)을 당한 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풀려나왔다. 그뒤 조정에서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할 때 그의 아버지는 신원이 되고 자신도 음보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뒤 다시 집경전(集慶殿), 순릉(順陵), 후릉(厚陵)의 참봉을 역임한 뒤, 1517년(중종 12)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에 승진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훈구세력에 의해 축출당한 뒤 1521년 사림파와 친밀했던 안처겸(安處謙)이 훈구대신을 해치려 했다는 무옥(誣獄)이 일어나서 남은 사림파가 다시 쫓겨날 때 아우 권전이 장살되면서 그도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고신(告身)을 되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