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광후(朴光後)
  • 순천박씨(順天朴氏),  출생~사망 : 1637 ~ 167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어머니는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아버지는 학식이 높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지행이 높고 학식이 고명하여 남방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다. 당시 스승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에 비유하였고, 또한 '큰불이 동연(洞然)에 타지 않은 구슬이다'라고 평하였다. 이후 벼슬할 뜻을 접고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기질을 세상에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우암에게 보낸 글에서 '사술(士述)이 죽으니 남주(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지는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시열(宋時烈)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관련된 글이 실려 있다.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중회(朴重繪)는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