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눌(士訥). 호는 청만(晴灣). 아버지는 감찰(監察) 금(錦)이며, 중부(仲父) 호(鎬)에게 입양되었다.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9년 북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고, 이듬해 검찰사(檢察使) 최황(崔滉)의 종사관(從事官)을 지냈다. 그뒤 의금부도사, 예빈시직장을 역임하고, 명나라 제독 이승훈(李承勛)의 휘하에 종군하여 그 공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감찰을 거쳐, 연천, 정읍, 산음현감과 호조좌랑, 이천현감을 역임하고, 1617년(광해군 9) 개천군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퇴하고 서울에 돌아와 죽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빈하여 칭송을 들었으며,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릴 때는 부호한 권세가들을 누르고 가난한 서민들을 보호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이 묘지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