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 고려의 간의대부 원부(原○)의 6대손으로, 식(軾)의 아들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가 있어 용서되고,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때 얼마 되지 아니한 기간이었으나 4, 000∼5, 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그 문명이 명나라 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함으로써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하였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韓濩), 권필(權○), 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하여 한호의 글씨, 최립(崔○)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또,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오산집 五山集', '오산설림 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 江村別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