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남극관(南克寬)
  • 의령남씨(宜寧南氏),  출생~사망 : 1689 ~ 17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거(伯居). 호는 사시자(謝施子). 증조부는 현령을 지낸 남일성(南一星)이고, 조부는 영의정(領議政) 이었던 남구만(南九萬)이며, 부친은 남학명(南鶴鳴)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 서문유(徐文裕)의 딸과 혼인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이미 13세인 1701년(숙종 27)에 '송춘용당인운(送春用唐人韻)'이란 시를 지었고, 15세인 1703년(숙종 29)에 '속동부악부(續東都樂府)'를 남겼다. 1708년(숙종 34)에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다음해 괴질(怪疾)에 걸려 이후 6년 간 병고에 시달렸다. 병중에 서글픈 자신의 심정을 달래려고 독서에 매진하여 독서록인 '단거일기(端居日記)'를 지었고, 설손(○遜)의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를 교수(校○)하고, 조부 남구만의 소차집(疏箚集)을 교정하기도 했다. 1713년(숙종 39)에 병중인 자신의 유고(遺稿)를 자편(自編)하여 '몽예집(夢○集)' 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까닭은 자신이 20여 세에 병을 얻어 오직 서책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간간이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문자로 표현했으나 자못 잠꼬대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몽예(夢○)라고 이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이 책은 건곤(乾坤) 2편으로 편차(編次)하였는데, 건편(乾編)에는 시(詩) 79수와 문(文) 10편이 실려 있고, 곤편(坤編)에는 사시자(謝施子)라 하여 필기류의 잡록(雜錄)을 실었다. 특히 잡록에 수록된 '김참판역법변변(金參判曆法辨辨)'에서는 지구 천체관 등 천문학에 관한 그의 독특한 견해를 볼 수 있다.이 글은 김공시(金公始)의 '신력불가용설(新曆不可用說)'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마테오리치(Matteo Riccio, 湯若望)의 구형설을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있다.이 문집은 당시로는 진보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해인 1714년(숙종 40)에 젊은 나이인 26세에 요절했다. 묘는 용인(龍仁) 대화산(大華山)의 의령남씨 선영(先塋)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