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미중(美仲). 호는 기천(岐川). 상호군 대로(大老)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0년 주서를 지내고 예조좌랑, 지평, 공조정랑을 거쳐 1605년 평양부서윤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죽주부사를 지낼 때는 임기가 끝났으나 민원에 따라 1년을 더 유임하였다. 뒤에 분승지(分承旨),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로 있을 때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파직되어 양근에 은거하였다. 1621년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모문룡(毛文龍)을 맞으러 가도(○島)에 건너갔다. 1623년(인조 1) 해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인솔하고 관찰사를 따라 평정에 종군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란하였다. 뒤에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모든 사무를 신속히 처결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난을 피할 때 사태가 위급해지자 모두 도망쳤으나 그는 태연하게 인장과 문서를 보관하고 보통 때와 같이 정사를 처리하였다. 난이 끝난 뒤 그 공로로 병조참의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다시 도총부도총관이 되었으며 이천부사를 역임하고 사임한 뒤 해주에 내려갔다. 1645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656년(효종 7) 90세가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공조판서가 되고 1660년(현종 1)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