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최언위(崔彦撝)
  • 경주최씨(慶州崔氏),  출생~사망 : 868 ~ 944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 초명은 신지(愼之), 인연(仁○). 최치원(崔致遠)의 종제이며, 문하평장사 항(沆)의 할아버지이다. 885년(헌강왕 11)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 문과에 급제하였다.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郞瑞書院學士)를 제수받았다. 935년(태조 18)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으며,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하여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치원,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한 것으로도 그의 문명은 짐작되는 바이다. 또한, 서법(書法)도 남달리 아름다워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朗慧和尙白月○光塔碑'와 같은 비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 朗圓大師悟眞塔碑銘', '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 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을 찬하기도 하였다. 아들로는 광윤(光胤), 행귀(行歸), 광원(光遠), 행종(行宗) 등이 있었는데, 광윤은 진(晋)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서 근무하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할 것을 알고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게 하였다. 행귀도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하여 비서랑(○書郞)이 되었다. 정광(政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