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번(金璠)
  •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생~사망 : 1479 ~ 154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서(文瑞).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 후손으로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삼근(金三近)의 증손이며, 조부는 한성판관(漢城判官) 김계권(金係權)이고, 아버지는 장령 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로 현령 김박(金博)의 딸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贈 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판서(判書) 홍걸(洪傑)의 따님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경기도사, 헌납, 이조정랑, 병조정랑, 예조정랑, 제용감첨정, 평양서윤, 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 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 이었던 1523년 관서 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쓰고 민식(民食)과 창름(倉○)을 넉넉히 하며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림들로부터 많은 기롱(譏弄)을 받았다.

갑진(甲辰)년 12월 23일 향년 66세에 졸하였다. 묘(墓)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리 자좌(子坐) 합폄(合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