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손엽(孫曄)
  • 경주손씨(慶州孫氏),  출생~사망 : 1546 ~ 160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자도(子○). 호는 청허재(淸虛齋).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였던 손중돈(孫仲暾)이고, 부친은 손광호(孫光暠)이다. 모친은 장수황씨(長水黃氏) 별제(別提) 황계옥(黃季玉)의 딸이다.

천생적으로 영특하였고,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며 특히 시에 능했다. 명종(明宗) 때 경주 지역에 인재가 융성하였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신라 옥적(玉笛)에 대하여 글을 짓게 하고, 서울에서 시관(試官)을 보내어 여러 유생을 시험하게 하였다. 그의 나이 15세에 참가하여 고등(高等)으로 뽑혔고, 이로 인해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68년(선조 1) 무진증광사마시(戊辰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592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으로서 태종의 수용(○容: 영정)을 봉안하여 예안(禮安)의 이영도(李詠道)의 서당에 옮겨 봉안한 뒤 가족을 이끌고 죽장산(竹長山)으로 들어갔다. 그 후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달려가 의병에 참여하여 전략을 세우고 군량미 조달에 협조하니, 고을이 이로 말미암아 안전하였다. 추천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82년(선조 15) 경상북도 경주 양동마을 설천(雪川) 가에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허무하다(水淸雲虛)'의 뜻을 딴 수운정(水雲亭)을 지어 한가롭게 노닐며 여생을 마쳤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이 찬한 묘지명(墓地銘)에 '덕(德)의 광채가 아름답고, 도(道)의 살찌움이 빛나는구나'고 하였다. 저서로 '청허재집(淸虛齋集)'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