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희무(李喜茂)
  • 덕수이씨(德水李氏),  출생~사망 : 1649 ~ 170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무경(茂卿). 예조참판 경헌(景憲)의 손자로, 목사 석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승지 심로(沈○)의 딸이다. 12, 13세에 경사(經史)의 뜻에 통하였고 약관에 진사가 되었으나 문과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1681년(숙종 7)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1689년 영평현감이 되었으나 관찰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정언, 헌납 등을 거쳐, 1695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된 후 보덕, 강릉부사, 사간을 지내고, 1698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사전(私錢)의 주조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뒤 승지를 지내고, 당쟁은 나라를 망치게 하는 근원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1702년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양구현 등 여러 군현은 사옹원(司饔院)에서 그릇을 굽기 위하여 요구한 백토(白土) 상공(上供)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양구지역의 백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점을 상소하여 이를 면제시키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대사간으로 재임시 정식(鄭○)이 이이명(李○命), 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편협하게 처리한 사간 윤헌주(尹憲柱)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신완(申琓)이 사복시(司僕寺)를 관장할 때 간사한 무리의 말을 듣고 당진, 태안의 민전(民田)을 빼앗자, 그를 탄핵하여 백성들에게 되돌려주게 하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70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의가 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07년 개성유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