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월당(松月堂), 송일(松日), 낙봉(樂峰). 할아버지는 대사간 경서(景敍)이며, 아버지는 공망(公望), 형은 욱(昱)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 예조좌랑에 보임된 뒤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함경도어사, 사간원헌납,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참지가 되었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첨지중추부사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562년 회령부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서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주상(主喪)을 맡아, 3년간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다. 1566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는데 판윤 재직 때 성황제(城隍祭)의 헌관(獻官)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하여 제사에 불참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전보되었다. 1568년(선조 1)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3년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석한 바 있고, 신병으로 판윤을 사직하자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다. 1583년 비변사 로부터 재경원수(在京元帥)로 추천을 받았으며, 범죄인을 사면할 때 외류(外流)이하는 납속(納粟)으로 속죄시킬 것을 주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