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한효순(韓孝純)
  • 청주한씨(淸州韓氏),  출생~사망 : 1543 ~ 16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여필(汝弼)의 아들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수찬을 거쳐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관찰사에 승진, 순찰사를 겸임하여 동해안지역을 방비하며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으며, 이해 한산도무과(閑山島武科)에 시관(試官)이 되었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군 강화에 힘썼으며,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남해지역의 순찰사로 나갔으며, 왜란이 평정된 뒤에도 해상군비강화에 계속 노력하였다. 일찍이 1599년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의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북선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쟁선(○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다음해 평안도관찰사,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6년 우찬성, 판돈령부사를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부화뇌동하여 광해군 난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고, 이듬해에는 폐모론을 주장하여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 유배시켰으며, 결국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 유폐(幽閉)하였다. 판중추부사로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