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망지(望之). 호는 노잠(魯岑). 경절공(景節公) 손중돈(孫仲暾)의 6세손으로, 부친은 손현(孫鉉)이고, 모친은 오천정씨(烏川鄭氏) 정호의(鄭好義)의 딸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1675년(숙종 1)에 을묘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척향소(斥享少)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입암서원(立巖書院) 근처에 집을 짓고 기거하면서 서원에 나가 유생들에게 '역학도설(易學圖說)'과 성리서(性理書) 등을 강독하였다. 1693년에는 조호익(曺好益)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 입암서원(立巖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을 세워 사액(賜額)을 청하여 사액을 받았다. 1702년 사림과 더불어 동강서원(東江書院)를 창건하여 선조인 경절공(景節公) 손중돈(孫仲暾)을 제향했다. 성품이 단아하고 자상하지만 매사를 삼갔다. 스승인 이현일과 가까운 인척이었는데, 그가 판서로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이면 남들이 혐의할까 두려워하여 내왕하지 않았다. 그가 귀향하자 붓, 벼루, 종이, 먹을 각 1개씩 봉하여 올렸는데, 이는 봉소(封疏)한 글에 대하여 용퇴를 하고자 한 것이다. 1666년(현종 7)에는 부친이 병환으로 생명이 위독하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살렸으며,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여막을 세워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저서로 '노잠문집(魯岑文集)'이 있는데, 1875년(고종 12)에 그의 6세손 손영준(孫永準)이 편집,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장석영(張錫英)의 서문이 있으며, 말미에는 정중기(鄭重器)와 손영준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시 114수, 소 1편, 서 1편, 잡저 2편, 제문 10편이 있고, 권2에는 만사 31수, 뇌사 1편, 제문 6편, 행장 1편, 묘지명 1편 등이 있다. 특히 서에는 '답혹인(答或人)'이라는 글이 있는데 가상인물에게 자기의 학문과 사상을 밝힌 것으로 태극에는 동과 정의 이치와 음양의 분(分)과 생(生)의 차례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에는 그와 손여규(孫汝奎) 형제를 추모하고자 채악당과 소로정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