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봉사(奉事) 응일(應一)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 활인서별제, 의금부도사를 거쳐 1615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근무하였다. 그뒤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강원도도사를 거쳐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을 때 병으로 부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때 이조에서는 변방고을에 부임함을 꺼린다고 하여 탄핵하기도 하였다.이 때문에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자 안주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뒷날 전공이 크게 인정되어 시호를 충민(忠愍) 이라 내리었고, 자손도 서용되었다. 손자 정필(廷弼)의 요청으로 정표(旌表)가 세워졌으며, 숙종 때에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