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후(德後). 조선 초 명신 정척(鄭陟)의 후손으로, 공청도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이며, 경기감사 정백창(鄭百昌)의 아우이다.
1623년(인조 1) 박사제자(博士弟子)에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저작, 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 봉교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을 따라 강화도 에까지 갔던 공로로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정언, 지평, 통진현감, 시강원필선을 지냈으나, 1632년 정원군(定遠君) 부에 대한 원종(元宗) 추존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 면직되었다. 1634년 예조정랑, 장령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정효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듬해 정문이 세워지고, 현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1623년(인조 1) 박사제자(博士弟子)에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저작, 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 봉교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을 따라 강화도 에까지 갔던 공로로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정언, 지평, 통진현감, 시강원필선을 지냈으나, 1632년 정원군(定遠君) 부에 대한 원종(元宗) 추존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 면직되었다. 1634년 예조정랑, 장령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정효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듬해 정문이 세워지고, 현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