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 아버지는 영의정 이자 거창부원군 인 승선(承善)이며, 어머니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딸이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1484년(성종 15) 음보(蔭補)로 장령에 기용되고, 1492년 우부승지로 승직됨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도승지가 되고, 이해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평안도를 순무하였다. 그뒤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1504년에 다시 돈령부첨정(敦寧府僉正)에 기용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6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에 박원종(朴元宗) 등이 장차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成大君: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그에게 넌지시 의사를 떠보기 위하여 누이와 딸 중 그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물어보자,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하였다. 박원종 등이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중종반정 때에 맨 먼저 역사인 신윤무(辛允武), 이심(李○) 등을 보내어 수각교(水閣橋)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그때 그의 시종(侍從)도 몸으로 막다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아우인 유수 수겸(守謙)과 판서 수영(守英)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수근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뒷날의 화를 두렵게 여긴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인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