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응(君應). 호는 낙천재(樂天齋), 동곡(東谷). 아버지는 현령 길(佶)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부윤 정(禎)의 딸이다. 1576년(선조 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부친상을 치른 뒤 1585년에 장사랑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이어 승정원주서, 감찰을 거친 뒤 호조, 예조좌랑을 거쳐, 평안도도사, 형조정랑,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종하다가 왕명에 의하여 군사를 모으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길이 막혀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지 못하고, 노모를 찾은 일로 뒤에 언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뒤 개천군수를 제수받고 부임하기 전에 모친상을 치른 뒤 다시 북청판관이 되었으며, 정평부사, 군자감부정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낸 뒤 경기도와 충청우도의 어사로 나갔다. 이어서 군자감정, 사간원정언을 거친 뒤 지평, 장령을 거치고 그뒤로 예빈시의 부정, 사옹원, 장악원, 제용감, 봉상시의 정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는 서인으로 그 즉위년부터 삭탈관직에 문외출송(門外黜送)이 되어 양근(楊根)의 전사(田舍)에 돌아가 낙천재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16년 동안 보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내섬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곧 물러났고 그뒤 여러번 기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