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여옥(金汝鈺)
  • 광산김씨(光山金氏),  출생~사망 : 1596 ~ 166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수(君粹). 호는 미산(薇山).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우급(友伋)이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 검열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도보로 강화 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환도 후 봉교(奉敎), 전적(典籍), 이어 예조좌랑,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향리에서 김지수(金地粹)와 함께 싸움터로 달려가는 도중 체부(體府)의 격문을 보고 함평(咸平)에서 의병을 일으켜 방어에 임하다가 상경하였으나,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군사를 해산하였다. 이어 지평, 장령, 정언, 사간, 집의, 필선 등을 역임하고, 여산군수(礪山郡守)로 나가 기민(飢民)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자 진강(陳講)의 기회를 얻어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647년 밀양부사로 나가 현저한 치적을 쌓았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뒤 한성부우윤에 임명되고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 및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대동법 실시의 불합리함을 주장하다가 체직되었다. 그뒤 부총관(副摠管), 형조참판을 거쳐 광주부윤이 되었으나 방백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렸다가, 형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를 거쳐 판결사(判決事)로 전직하여 노비송안(奴婢訟案)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나, 병을 얻어 파산(坡山)의 장사(庄舍)로 돌아가 치유를 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