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섭(君涉). 호는 월봉(月峯). 아버지는 인후(因厚)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관찰사 이경(李璥)의 딸이다. 1605년 진사가 되었고, 1615년(광해군 7) 38세에 알성문과시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지제교(知製敎), 사헌부장령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진사 정택뢰(鄭澤雷)와 함께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며, 1624년 고향인 창평(昌平)에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태인(泰仁)에 이르러, 이괄이 이미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공주 등지로 피란가는 동궁을 호가(扈駕)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이 고매하고 천품이 겸손하면서도 의리에 강직하였다. 그가 죽자 김상용(金尙容),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이상형(李尙馨) 등 당시 명공석학들의 많은 만장이 답지하였다. 저서로는 '월봉집' 9권이 있다.